top of page
미얀마 국기.png

미얀마(Myanmar)

​미얀마 소개

미얀마를 버마라고 알고 있으신 분들도 계실 텐데요.  버마가 미얀마로 국명이 바뀌게 된 것에 다양한 이유들이 있지만 보편적으로 알려진 이유로는 영국의 잔재를 없애기 위한 노력, 혹은 민족 간 차별을 없애기 위한 노력, 이러한 명분 하에 미얀마로 국명을 변경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도차이나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미얀마는 국민의 대다수가 불교를 믿어 불교의 나라로도 알려져 있으며 100개가 넘는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는 나라입니다.

KakaoTalk_20211013_141739824.jpg

​소속민족

​미얀마 전국에는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는데 특히 지도 별로 살고 있는 민족들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미얀마 경제

미얀마는 2019년 기준으로 760억 9천만 달러 정도의 명목 GDP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국가들 중 하나이다. 미얀마에서는 법적으로 외국인들이 미얀마 내에 자산들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대신 임대권만을 허용하고 있다. 2014년 12얼에는 첫 주식거래소인 양곤 증권거래소를 개장하기도 했다.

미얀마는 워낙 경제적으로 낙후된 국가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비공식 부문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세계적으로도 가장 높은 국가에 속한다. 게다가 수 십년 동안 이어져 온 내전과 정치적 불안정, 군부의 부정부패 등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도 빈곤한 국민들이 굉장히 많으며, 비록 자원 수출을 중심으로 수치상 성장은 거듭하고 있으나 실질적인 사회적, 경제적 성장은 상당히 더딘 편이다. 해외로 수출하는 상품들은 주로 이라와디 강과 태국을 통하여 외국으로 보낸다. 중국과 인도는 2010년대부터 동남아 지역에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미얀마와의 협력을 공고히 했으나, 미국과 EU 대부분 국가들은 인권 문제로 인하여 지난 몇 십년 동안 극심한 경제 제재를 가했다. 그러나 2010년대에 미얀마가 점진적인 민주화에 들어서자 미국도 이에 태도를 바꾸어 미얀마에 대한 경제 제재들을 해제하였으며, 투자도 점차 늘리고 있는 추세이다. 현재 미얀마에 가장 많이 투자하고 있는 국가들은 주로 동아시아 계열 국가들로, 중국, 싱가포르, 필리핀, 대한민국, 인도, 태국 등이 있다. 현재 미얀마에서는 군부가 관광업, 운송업, 석유 채굴업 등 주요 산업들을 대부분 틀어쥐고 이권을 따로 챙기고 있으며 부패도 심각하다.

경제사    편집
영국 통치기의 미얀마에서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버마족들이 경제적으로 가장 빈곤한 삶을 살았으며, 외국에서 이민해온 중국인들, 인도인들, 기독교로 개종한 소수민족들이 중산층 계급을 이루었고 유럽 백인들이 유산층을 이루고 있었다. 미얀마는 유럽의 통치 하에서 무방비한 상태로 세계 경제권에 편입되어야만 했고, 영국은 미얀마의 농업을 집중적으로 육성시키면서 막대한 양의 부를 침탈해갔다. 이후 미얀마는 세계 최대의 쌀 수출국으로 떠올랐으며, 주로 유럽 시장에 쌀을 내다팔았다. 영국은 당시 미얀마의 양곤을 인도 캘커타와 싱가포르 사이를 잇는 초대규모 항구로 키울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아시아의 이민자들 대다수를 수용하면서 1920년대에는 심지어 뉴욕을 제치고 세계 최대규모의 이민항이라는 지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때 엄청난 수의 인도인들이 미얀마로 쏟아져 들어왔고, 영국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으며 미얀마의 경제권을 장악, 오히려 현지인들을 내쫒고 경제적 이권들을 독점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버마인들은 이같은 영국의 행패에 무력했고,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미얀마의 전통적인 산업이었던 원유 채굴은 식민지화가 이루어진 직후 영국에게 넘어갔으며, 영국 회사인 ‘버마 석유’에게 독점적으로 맡겨졌다. 영국령 버마는 1853년부터 원유를 수출하기 시작했고, 세계 생산량의 75%를 홀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원유 수출로 인하여 벌어들인 돈들은 거의 대부분이 유럽에게 넘어갔으며, 1930년대에 국제 쌀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하자 농업에 크게 의존하던 미얀마 경제도 빠른 속도로 피폐해져만 갔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버마가 일본군에게 침공당했을 때에, 영국군은 이들을 막기 위하여 청야전술을 사용했다. 이 때문에 당시 미얀마의 행정건물들, 원유 채굴공장, 광산 등이 대규모로 파괴되었으며 연합군 측은 일본을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엄청난 규모의 공습을 가했다. 이 때문에 독립 직후의 미얀마는 말그대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폐허에 가까웠고, 식민지 시대에 세워놨던 얼마 되지 않은 인프라마저 박살난 상황이었다. 1948년에 미얀마 정부가 들어서자, 우 누 총리는 대규모 국유화 정책을 발표했고 모든 토지를 나라의 것으로 만들었다. 정부는 8개년 계획을 세워 화폐를 다량으로 찍어내 투입했으나, 이로 인하여 인플레이션만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1962년 이후, 군부는 ‘버마식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농업을 제외한 모든 산업들을 국유화하고 정부의 통제 하에 놓는다는 정책을 실시했는데, 부패한 군부가 주도하는 경제 성장이 당연히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고 미얀마는 동남아 내에서도 가장 느린 속도로 경제가 성장하는 국가로 뒤떨어졌다. 1987년에 미얀마는 국가 부채를 일부 탕감받기 위하여 국제사회에 미얀마의 최빈국 지위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Copyrightby: 나무위키

​재한 미얀마 학생.직장인들과 같이 하는 공영과 노래

경기도 아트센터 소국장~ 2021.03.14에 한국사람들과 같이 하는 미얀마의 봄...

https://www.youtube.com/watch?v=1VXRKMU20FM&t=4064s

경기도 의회와 같이 하는 미얀마의 봄

https://www.youtube.com/watch?v=lYp3elK7KeM&t=2144s

 

미얀마의 봄 광주를 만나다 I Myanmar’s spring meets Gwang-ju

https://www.youtube.com/watch?v=MAJT5CN22xo

 

 알로맛시+그날이오면 cover by 라오니엘+재한미얀마대학생연합

https://www.youtube.com/watch?v=ULv044BNlKE&t=24s

어려움을 격고 있는 미얀마에 대해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져주신 본들께 감사합니다.

저희 미얀마를 후원금을 도와주고 싶으시면 군포이주와다문화센터를 통해 연락할 수 있습니다.

​후원금 계좌번호>>>

 

국민은행 370401 01 199359 _군포이주와다문화센터

미얀마 역사와 근.현대 배경

 

 

 

과거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배를 당했던 미얀마는 국부 Aung San장군의 노력과 함께 1948년에 독립을 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의 구심점이 되었던 Aung San장군이 암살을 당하게 되면서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가운데 과거 Aung San 장군과 독립군을 이끌던 네윈 장군이 군부로서 힘을 쌓아 쿠데타를 일으키며 정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미얀마는 군부독재가 시작되었습니다.

 네윈 정권의 힘이 쇠약해지는 틈을 타 1988년도에 Saw Maung이 쿠데타를 다시 한번 일으켰습니다. 이에 항거하는 학생들의 주도하에 시작된, 88항쟁에는 Aung San장군의 딸인 Aung San Su Kyi가 등장하면서 국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에도 과격한 폭력진압과 Aung San Su Kyi의 감금으로 많은 희생자만 남긴 채 결국에는 다시 군부가 정권을 잡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끝나지 않고 군부는 2007년 미얀마 스님들의 주도하에 시작된 샤프론 혁명 또한 과한 폭력 진압으로 우리 국민들의 뜻은 다시한번 무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태에서 일본기자의 사망과 많은 이들의 무참히 죽어가는 사진과 동영상들이 널리 퍼지게 되면서 국제 사회는 미얀마에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국제 사회의 눈치를 보게 된 군부는 헌법을 제정하거나 대통령을 뽑는 등 민주적인 행보를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민주주의의 탈을 쓴 군부의 보여주기 식 정치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5년 이후 Aung San Su Kyi 노력으로 미얀마는 조금이나마 민주화에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2020년에 총선이 치르게 되었는데요. 선거에서 지게 된 군부는 정권을 잡고자 결국에는 다시 한번 쿠데타를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2020년 총선에서 부정투표 의혹이 있었는데 정부에서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는 이유 하나였습니다. 쿠데타와 동시에 현직 대통령과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을 포함한 국가지도자들이 구금되었습니다.   

이미 쿠데타를 겪어보았고 군부 독재하에 몇 십년 살아온 경험이 있는 국민들은 이에 분노하여 냄비를 두드리며 규탄의 의사를 밝히고, 거리로 나와 평화시위를 했습니다. 2021년2월22일에 22222혁명이라는 이름을 따서 전국의 국민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모여 마치 강을 이루는듯한 인파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보건복지부 및 의사-의대생연합이 시작으로 전국 모든 정부기관의 공무원들이 시민 불복종운동 (CDM)에 참여하여 반 군부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평화시위를 하는 국민들을 향해 군경들이 최루탄과 고무탄에 이어 실탄까지 발사하는 등 폭력 진압들이 시작되면서 거리는 국민들의 피로 가득 찼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얀마 국민들은 미얀마 군경의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폭력 앞에 쓰러지고, 소중한 목숨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9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것뿐만 아닙니다. 3,500명 이상의 국민들이 구금되어 있는 데다가 최근 들어, 체포 후 고문과 구타로 사망한 뒤 시체만 가족들에게 돌려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잔혹한 일들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있는 듯, 재미로 학살을 하는 장면들이 SNS를 통해 전해지고 있어  국제 사회에 큰 총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시위에 참여한 국민들을 대상으로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무단 체포에 나선 군경들 때문에 국민들이 공포에 떨며 안전한 밤을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집에서 조차도 안전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가 이미 석달이 지났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호소하는 국민들을 향해 무자비한 총격과 폭행, 강제노동, 납치 후 고문, 살해 등 온갖 잔혹한 행위들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국제사회에서는 강건너 불구경하듯 소극적인 대응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국제사회가 도움을 주지 않자 소수민족의 무장 단체들이 국민들과 협동하여 군경들과 맞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군부는 폭격기를 소수민족의 지역으로 보내 폭격을 하고 있어 수천명의 전쟁 피난민들이 터전을 떠나 태국 국경쪽으로 도망을 쳐야 되는 상황입니다.

국가를 외적들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고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경들이 국민들 상대로 집단학살, 전쟁범죄, 반인륜적 범죄 등을 저지르고 있는 가운데에 저희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은 단지 국제사회뿐입니다.

대한민국은 어느 국가보다 군부독재의 잔혹함과 슬픔을 직접 경험했던 나라이기에 현재 우리의 아픔에 공감하여 많은 도움과 격려를 보내고 있어 미얀마 국민들을 대신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앞으로도 미얀마의 현 상황이 국제사회의 큰 문제로 대두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응원 부탁드리겠습니다.

 

KakaoTalk_20211013_134814070.jpg

​현재 상황과 난민

미얀마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지 9개월이 되었습니다. 부정선거를 내세워 문민정부를 뒤집은 군부는 저황하는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지금 까지 사망자가 1천명이 넘은 데다가 난민도 80만 명이 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군부는 무차별 공습과 포격 등이 있어 학교와 종교실설 등 민간인 보호 시설을 파괴해 수만 명을 거리로 내쫓았습니다. (2021.11.2)

 미얀마 북쪽 친민족들이 중심으로 살고 있는 "탄따빈"라는 지역에 군부의 심한 퐁격들을 아래 사진에 볼 수 있습니다.

bottom of page